이야기로 빚어낸 술&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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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야기
제목 물 좋은 마산의 술, 대전정종을 아시나요?
날짜 2018-12-12


물 좋은 마산의 술, 대전정종을 아시나요?


◦ 일제강점기 경남 마산 석교주장에서 생산하였던 대전(大典) 정종 광고


◦ 대한제국시기,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뒤, 마산에 내려와 살던 장지연도, 서성동 석교양조장에서 만든 대전 정종을 즐겨마셨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 당시 마산의 청주공장들은 대개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신마산, 중앙동, 장군동 등 중앙마산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 일본식 청주는 지역의 상류인사들에게 고급스런 술집에서 마실 수 있는 술로 선택되었는데, 국가의 기술감독, 기술자 초빙 및 연구실 설치, 품평회를 통한 질의 향상, 그리고 고도의 영업전략 등이 동원된 결과였다.


◦ 경남도민일보 “일본 청주에 밀려난 조선 탁주”에 따르면 <마산 지역이 술의 생산지로 양호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곧바로 술의 주 생산지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재정수입 확보라는 식민지 경제전략이 마산을 술의 도시로 성장시켰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주세법을 제정하여 자가제조 술을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술을 만드는 원료인 누룩에 대해서도 해당되었다. 누룩업을 통제하여야만이 주조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누룩제조조합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누룩도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조하게 되었다. 기존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하던 방식을 대신하여 일본식 주조 기술이 도입되었고, 이를 지도하기 위해 각 지방마다 기술관이 파견되었다. 또 주류협회를 조직한 다음 이곳을 재정담당 관료가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34년에 이르면 주세는 국가 세입의 3할을 차지할 정도로 그 비율이 높아졌다.
또한 개항 이후 마산지역에 형성된 일본인 사회도 마산의 술 산업을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 일본인이 마산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였는데, 이때 이미 술 공장이 설립되었던 것으로, 1911년에 이르면 일본인이 세운 술 공장이 14개나 되었고 일본인들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청주가 한국 사회에 도입되었다. 이들 청주업자들은 동업조합을 만들어 시내 신사(神社)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모여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또 청주 질 향상에도 힘을 쏟은 결과 1920년대 초에는 일본에서 더 이상 청주 수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930년대 중엽에 이르면 마산은 전국 최대의 술 생산지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지역 내 시장이 커진 탓도 있지만, 만주라는 큰 시장 덕분이었고,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가 만주까지 진출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 일제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 가운데 마산의 술이 이름났던 이유를 꽃 속에서, 그리고 마산만을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특히 조계지를 가로지는 대곡가(大谷川)에는 유명한 고급 술집과 함께 벚꽃이 화려하였기 때문에 꽃필 무렵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만든 <관광의 마산> 팸플릿 표지에는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일본풍의 술통과 벚꽃이 흐드러진 곳으로 마산을 그리고 있다. 마치 이상향과 같은 이미지로, 이곳에 일본에서 들여온 기생과 음악, 멋진 음식과 술로 인해 마산의 명사들이 모이던 사교장 역할을 하였다.


◦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술의 도시 마산이라는 명성은, 일본인들이 물러가면서 그들이 즐겨 마시던 청주의 생산량이 줄고, 일본인에 의해 이식된 주조기술이 한국인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않은 탓과 함께, 해방 이후의 식량난이 겹치면서 쇠퇴되었다.



출 처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 마산, 창원 역사 읽기(39)
경남도민일보